이익을 보면 의를 잊고 위기 앞에서는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들 by 무량수불

  세상에는 인간의 숫자 만큼이나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중시하는 가치도 다르다. 이 글은 인간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익'에 관한 이야기다.


  이익은 인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익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이익에서 먹을 음식이 나오고, 살 집이 나오며, 입을 옷도 나온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가치는 생존 본능이고 따라서 이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는 이익은 인간에게 매우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은 이익 앞에서 초연해지기 어렵다. 공자님께서 괜히 "군자는 의를 숭상하고 소인은 이익을 숭상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군자가 되기는 어렵고 소인이 되기는 쉽기 때문에 세상에는 소인은 많고 군자는 적다. 군자가 되기가 소인이 되기보다 어려운 이유는 이익을 쫓는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의를 쫓는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자도 이익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군자와 소인의 차이점은 군자는 이익을 쫒되 의를 잃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소인은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의를 외면하기도 한다. 이런 간단한 이치 때문에 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이익 앞에서 어떤 자세를 보이는가를 근거로 한다.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더 큰 사회적 책임도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일종의 사명감이라고 해도 좋은 그런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그런 능력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남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때문에 이런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면 당연히 자신의 능력의 일부를 행운을 가지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대한 대가이고 예의라고 본다. 세상에 거저, 이유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내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는 남보다 우위에 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공익을 위해서는 사용할 생각은 없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부류이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활용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버리면서까지 공익을 위해,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나는 한나라당과 조중동 그리고 이에 부역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경멸하고,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에서 모셔갈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이에 대항하는 정당인, 활동가, 언론인, 생활인 등의 모두를 존경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나라당과 진보정당이 다를 게 뭐냐' 혹은 '조중동과 한경오가 다를 게 뭐냐'라고 말한다. 나는 단순히 진보정당이나 흔히 말하는 진보언론에 몸 담고 있다고 해서 좋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가지 확신하는 건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에서도 대우를 받을만한 능력을 가진 소위 '엘리트'가 한나라당에 대항하여 맞서고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언론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 자체로 어느정도는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대학교수같은 기득권 계층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대기업 등에 부역하며 이익을 취하는 껍데기 지식인들이 즐비한 사회에서 그쪽편에 서거나, 아니 단순히 입 다물고 중립인척만 해도 떨어지는 콩고물이 적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기득권에 맞서는 올곧은 교수들을 나는 존경한다. 


  안중근 의사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말씀을 남겼지만 세상에는 견리망의 견위걸명(見利忘義 見危乞命)하는사람이 훨씬 많다. 그리고 사회의 지도자가 이런 자세를 취할 때 그 사회는 타락하고 타락이 한계치에 이른 사회는 결국 붕괴된다. 지금 우리사회가 그나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유는 열심히 일신의 영달을 쫓고 있는 '가짜 엘리트'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다소간의 이익을 포기하고, 혹은 큰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공동체를 위해 쓰고 있는 '진짜 엘리트'들과 소수일지라도 이들을 뒷받침 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그리고 나도 이 대열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차도남, 차도녀 열풍이 불편하다. by 무량수불

요즘 차도남, 차도녀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각각 차가운 도시 남자와 차가운 도시 여자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여기에다 까도남, 까도녀 등의 아류들까지 나오고 있다. 가벼운 농담으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를 '차가운' 혹은 '까칠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대저 '차가운' 혹은 '까칠한' 사람은 경원의 대상이었지 동경의 대상은 아니지 않았는가. 언제부터 '차갑고 까칠한' 사람이 되는 게 멋스러운 일이 되었을까.


차도남, 차도녀의 유행을 보고 있자면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멋있다'와 동일어로 쓰이고 있는 '쿨하다'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와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로 '시크하다'도 있다. 10대, 20대의 젊은층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쿨하다', '시크하다'같은 말은 원래 영어권 국가에서 쓰는 표현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널리 쓰이면서 용법이 확장되어서 갖다 붙이지 말아야 할 곳에 '쿨하다'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원래의 의미대로라면 '쿨한 사람'은 '멋있는 사람' 이어야 하는데 요즘 '쿨한 사람'은 '예의없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의 의미도 포함되는 것 같다. 이는 젊은층들의 글을 보면 속칭 '싸가지 없는' 혹은 '안하무인인' 사람을 '쿨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관계에서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말 그대로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를 사람을 쿨하다고 한다. 만날 때도 쿨하게 만나고 헤어질 때도 쿨하게 헤어지는 게 요즘 세대식 연애법이다. 이는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쿨하다'라는 포장을 벗겨보면 그 속에는 쿨한 만큼 가벼운 인간관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연애가 가벼운 이유는 그 안에 인간관계의, 특히나 연인처럼 가까운 인간관계라면 더욱 중요한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목적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인간관계에서 책임감을 기대하긴 어렵다. 가벼운 만남, 속칭 '엔조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연애를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세태에 이런 얘기는 고루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천박함들을 그냥 보아 넘기기가 어렵다. 요즘 쓰이는 변질 된 '쿨하다'의 용법을 조금 비약하자면 최철원이 화물 노동자를 폭행하고 매값을 지불한 사건이나 이건희가 거액의 추징금을 일시불로 납부한 일은 '쏘쿨'한 일이 된다. 그리고 이런 '쿨하다'의 연장선상에 차도남, 차도녀가 있다. 


근래의 차도남, 차도녀 열풍을 보면서 "안그래도 각박한 세상에 왜 스스로 '차가운' 사람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차도남, 차도녀보다는 오래 됐지만 마찬가지로 유행하는 신조어 중에 훈남, 훈녀가 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말 그대로 훈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는데 지금은 미남, 미녀와 무슨 차이가 있는 말인지 모를 정도로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경우로 '얼굴이 착하다', '몸매가 착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외모가 잘난 사람이 훈훈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버린 세상이다.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차갑고 도도한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지금의 세상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차도남, 차도녀가 아니라 내면이 훈훈한 진정한 훈남, 훈녀들이 멋있어 보이고 워너비가 되는 세상은 언제쯤 올까.


  

1